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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알약

옥탑방청년 2015.05.24 13:59

푸른 알약 / 프레데릭 페테르스 지음 / 유영 옮김 / 세미콜론


세상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지 말라. 그저 되어가는 대로 받아들여라.

- 에픽 테투스


요새 뭐해먹고 살지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은데, 한씨가 페이스북에 책 읽었다고 올려놓은 이 구절을 보니 요즘 고민중인 것들에 대한 도움이 될 것 같아 빌려다 읽었다.


내용은 지금도 진행중인 평범하지 않은 연애 이야기를 주인공이자 작가인 남자의 시점에서 이야기 한다.

책의 초반은 첫 만남의 기억에서부터, 느낀 그대로를 직설적으로 얘기하고 사람 놀리기 좋아하는 여자와, 속내를 표현 못하고 쩔쩔매는 순둥이 남자의 에피소드들로 가슴 설레게 한다. 서로에 대한 감정을 조심스레 털어 놓는 두근대는 순간까지 여느 연애 이야기와 다름 없다. 순탄할 것 같던 평범한 연애 이야기는 이 순간 반전이 됐다.


여자는 에이즈 보균자이다.



사랑은 잔혹한 여신이다. 이 여신은 모든 다른 신들처럼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하며, 인간이 자기에게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적 자아까지도 희생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다. ... 이 숭배의 극치는 자기희생이며 자살이다.

- 비판적 비평 / 에드가 바워 [각주:1]


연인 관계에서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헌신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생명에 치명적인 불치/전염병 보균자인 여자와 평범한 남자인 두 연인 사이에서 헤게모니는 남자에게 있다. 언제든지 연인을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남자는 그리하지 않고 이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책은 남자의 무조건적인 자기 희생 신파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두 사람 나름의 타협점을 찾아가며 갈등의 증폭을 줄여 가고, 연인에 대한 존경으로 연인이 느낄 죄책감을 따뜻하게 보듬어 준다. 물론 평범하지 않은 여자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따르는 자기 희생은 크다. 이 여자친구와는 성관계시 평생 콘돔을 사용해야 하며[각주:2], 이혼녀인 여자친구와 전 남편과의 사이에 생긴 아이까지 챙겨야 한다. 사소한 상처에도 감염이 두려워 밤을 지새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연인에 대한 동정과 사랑 사이에서 스스로에게 화를 낸다.


이 책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기에 여자의 복잡다단한 심리에 대해 자세한 묘사가 나오지 않고 대신 남자의 입장에서 느꼈던 감정들로 대리 묘사된다. 그렇지만 여자도 마찬가지로 연인에 대한 죄책감, 미안함, 자기연민 그리고 사랑의 감정들이 뒤섞여서 관계를 지속해 오는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다.

-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아이는 엄마로부터 수직감염되어 항상 죽음과 직면하고 있고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조그마한 부주의로 남자도 감염 될 수 있다. 자신들보다 아이가 먼저 죽음을 맞이할까봐 두렵다.

남자가 꿈속에서 만난 매머드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난 말이야, 이따금 내가 이 상황을 잘 헤쳐가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곤 해. ... 난 편이나 들어주고 도와줄 뿐이지. 그래서 균형을 잡으려면, 내가 모든 걸 긍적적으로 바라봐야 해." "아마 이 병은 자네한테 최악의 불운이자 최고의 행운이 될 거야. 가장 본질적인 것에 눈을 뜨게 해 줄지도 모르지."

본의 아니게 병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고, 사회제도에 의해 격리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아이를 갖게 해 줄거냐는 여자의 물음에 선뜻 대답 하지 못 하며, 운이 안 좋으면 자신도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렵고 화가 난다. 이 연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극히 평범하고 행복해야 할 것들을 누릴 수 없음에 대한 분노를 스스로 다스려 가며, 그 안에서 그들만의 행복을 찾아가며 살아낸다.

"난 카티가 정말 좋아. 예전부터 줄곧 그랬어. 게다가 우린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맞는 커플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게 이런 것 아냐? 그러니 이따금 성기에다 20분의 1밀리짜리 얇은 고무를 끼워야 한다는 이유로 이 모든 걸 포기할 순 없잖아."


빌린 책이 증보판이어서 그런지 그 후 뒷 얘기들이 있다.

자라서 열여섯이 된 아이의 인터뷰, 둘 사이에 태어난 감염되지 않은 아홉살 딸,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자의 말, 삶은 아름다워요!

내 입장에서 보면 나보다 훨신 높은 강도의 인간적인 고민들을 끊임없이 하며, 그에 분노하고, 그렇게 사는게 지치긴 하지만, 그들은 내가 보기에 이미 세상을 달관했다고나 할까. 농담으로 부부는 의리로 산다고 하지 않던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역경과 고난들은 사랑만으로는 넘을 수 없고 서로에 대한 존경과 연민, 책임이 뒤따랐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그 과정들이 무척이나 힘겨워 보이고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으면서 엷은 미소를 짓게 됐고 내 인생을 사는데 조금의 지혜를 얻었다고나 할까.




  1. 비판적 비평을 읽은게 아니고,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 나오는 인용구이다. 몇년째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 덮고 있다. [본문으로]
  2. HIV 바이러스가 혈액, 정액, 질액에 가장 많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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